여성운동 하는 데도 '친정 엄마'가 필요하네
여성운동 하는 데도 '친정 엄마'가 필요하네
  • 칼럼니스트 최가을
  • 승인 2020.10.30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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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엄마의 방구석 심야 영화관] '미스 비헤이비어'(2020)
샐리의 대학원 합격 소식을 듣고 함께 기뻐하는 파트너 개리스와 딸. ⓒ판시네마(주)
샐리의 대학원 합격 소식을 듣고 함께 기뻐하는 파트너 개리스와 딸. ⓒ판시네마(주)

'미스 비헤이비어'는 1970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미스월드 대회에 반대하기 위해 여성운동가들이 대회장에 잠입하여 행사를 방해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주인공 샐리는 싱글맘이자 사학과 대학원생이다. 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여성해방 운동가들과 미스월드 대회 반대 캠페인도 한다. 자유롭게 거리를 쏘다니며 캠페인 포스터를 붙이는 샐리를 보면서 의문이 생겼다.

“샐리가 저렇게 사회활동 하는 동안 애는 누가 보지?”

다행히 샐리에게는 샐리의 학업과 여성 운동을 모두 지지해주는 파트너 개리스가 있다. 그럼에도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그 아이에게 24시간 365일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샐리와 개리스만으로 딸 아이 양육이 순조롭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하여 친정 엄마가 동원된다.

샐리의 친정 엄마는 극중 비중이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일하는 시간 동안 베이비시터와 친정 엄마 두 분께 쌍둥이 양육을 맡기고 있는 입장에서 영화를 보니 이들의 짧은 대화가 인상 깊게 남았다.

샐리, 딸, 친정 엄마 에블린. ⓒ판씨네마㈜
샐리, 딸, 친정 엄마 에블린. ⓒ판씨네마㈜

샐리의 딸을 밤늦게까지 봐주던 엄마 에블린은 귀가한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그 광신자들(=여성운동가들)하고 몰려 다닐 때 개리스하고 난 네 딸을 돌보고 있어.”

에블린의 첫 번째 팩트폭력. 돌봄 노동이라는 만국 공통의 첨예한 이슈가 등장한다. 샐리는 공부도 하고 싶고 세상도 바꾸고 싶은데, 아직 어린 딸은 24시간 부모가 필요하다. 자녀가 있는 여성의 해방은 '자녀 돌봄 노동을 어떻게 분담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구원자가 등장하노니 그 이름은 친정 엄마인데, 그 친정 엄마가 세상 속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딸의 발목을 잡으며 말한다. 집에서 애 보라고.

“진짜 웃긴 게 뭘 줄 아니? 넌 여성 권리를 위해 싸우면서 늘 아버지 편에 서는 거야. ‘내가 크면 아빠 같은 사람이 될래.’”

“아빠는 뭔가를 했으니까. 담배도 피우고 택시도 타고 모험도 하고. 나도 모험이 하고 싶었어. 엄마는 비좁은 가정이라는 세계에 갇혀 있는 걸로 보였어. 아무도 엄마처럼 되면 안 돼.”

'광신자들'과 몰려 다니며 미스 월드 반대 캠페인을 하는 샐리. ⓒ판씨네마㈜
'광신자들'과 몰려 다니며 미스월드 반대 캠페인을 하는 샐리. ⓒ판씨네마㈜

◇ "내가 너처럼 행동했다면 너와 네 언니들은 어떻게 됐을까?"

샐리는 여성을 위해 싸우면서, 전업 주부로 헌신했고 지금도 샐리에게 헌신하고 있는 에블린의 삶을 부정하고 아버지의 삶을 동경한다. 모순이다.

그러나 이 모순을 단순히 샐리 개인의 잘못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여자라면 은행 계좌 하나도 남편의 허락 없이는 열 수 없었고, 전국으로 방송되는 프로그램에서 여성의 신체 치수가 우렁차게 울려퍼지던 시대. 사회 전체가 똘똘 뭉쳐 여성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데, 자신보다 더 자유가 없었던 에블린의 삶을, 샐리가 도저히 역할 모델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너처럼 생각하고 너처럼 행동했다면 너와 네 언니들은 어떻게 됐을까? 내 결혼 생활과 애들을 등한시했다면?”

에블린의 두 번째 팩트폭력. 그렇다면 가정은 누가 지키냐고, 여성해방을 외치면 가정을 지키는 일의 소중함을 등한시해도 되는 거냐고, 에블린은 딸의 뼈를 때린다.

물론 에블린의 과녁은 딸만을 향한다는 점에서 잘못됐다. 그녀는 사위가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 준비만 해도 ‘딱하다’고 생각하니 딸과 사위에게 애초에 적용하는 기준이 다르다. 그러나 남자가 자기 입에도 들어갈 가족의 식사 준비를 하는 게 과연 그렇게 불쌍할 일인가.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캐릭터로 그려지는 샐리. ⓒ판씨네마㈜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캐릭터로 그려지는 샐리. ⓒ판씨네마㈜

남자들은 다 어디에 가고 여자 둘이 남아 가정을 지키는 일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며 대화해야 할까. 샐리의 아버지는 왜 손녀 양육에 참여하지 않을까. 개리스에게 육아휴직이 의무화되었다면 에블린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왜 돌봄 노동은 늘 여성의 몫인가. 안타까움과 분노를 함께 느끼며 이들 모녀의 말싸움을 씁쓸하게 바라봤다.

아마도 나의 일상이 이들 모녀와 닮은 점이 많아서 그랬을 것이다. 나의 엄마는 헌신적이라는 점에서 에블린과 같지만, 딸의 사회 활동을 적극 지지한다는 점에서 에블린보다 진보적이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노년을 갉아 먹으면서 내 커리어를 유지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떨칠 수 없다. 나라는 여성이 24시간 엄마로만 살고 싶지 않아서, 자식들을 다 독립시킨 60대 여성이 다시 엄마로 소환된다. 나는 날마다 엄마의 9시간을 빌려 쓴다. 노년 여성의 희생으로 중년 여성의 커리어를 간신히 유지하는 형국.

남편이 일찍 퇴근할 수 있다면, 남편도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회사에 다닌다면, 원래는 남편이 했어야 하는 돌봄 노동을 엄마와 베이비시터라는 또 다른 여성 둘에게 맡기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물론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등 사회에서 맡는 돌봄 노동의 질이 향상되는 것도 전제되어야 할 일이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을, 나는 친정 엄마의 시간 도둑이 되고 나서야 절실히 깨달았다.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영화관에 갈 시간이 없어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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