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도 잎도 떠난 겨울 나무가 더 아름다운 이유
꽃도 잎도 떠난 겨울 나무가 더 아름다운 이유
  • 칼럼니스트 최은경
  • 승인 2020.07.0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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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편지] 김장성 글, 정유정 그림 「겨울, 나무」

'꽃 핀 적엔 보지 못했네.’

「수박이 먹고 싶으면」으로 잘 알려진 김장성 작가가 쓰고 정유정 작가가 그린 「겨울, 나무」(이야기꽃, 2020년)의 첫 문장이야. 여기까지 읽은 내 첫 반응은 '무슨 그림책이 이래?' 였어. 다음 페이지를 쉽게 넘길 수가 없을 만큼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문장이었거든. 한동안 멍한 기분마저 들었지. 하지만 어느새 내 손가락은 다음 페이지로 향하고 있었어. 대체 뭘 보지 못했다는 건지 궁금했거든.  

‘꽃 잔치 받치던 잔가지들.'

멍한 상태에서 뒤통수 한 번 더 맞은 기분이었어. 내가 꽃 핀 적에 못 보고 지나친 잔가지들은 뭘까. 그 후로도 마지막 페이지까지 문장 하나하나 곱씹으며 어렵게 읽어내려간 그림책이야. 맨 뒷장을 덮었을 때 선배가 생각났어. 왜 그랬는지 그 이야길 하려고 해.

선배, 이 그림 봐봐. 참 예쁘지. 이 그림 보다가 선배 생각이 났어. ⓒ이야기꽃
선배, 이 그림 봐봐. 참 예쁘지. 이 그림 보다가 선배 생각이 났어. ⓒ이야기꽃

사람들이 그러더라. 회사를 그만두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고. 나란 존재가 그저 명함 안에 있는 사람에 불과하단 사실을 알게 된대. 그게 너무나 허무하대. 과거의 나는 그냥 과거고, 사람들은 오로지 지금의 나만 본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미물이 되었다는 사실이. 선배도 그랬을까. 힘들어서 그만뒀는데, 그만둔 게 더 힘들었을까.

5년도 넘은 일인데 아직도 기억나. 의도와 달리 업무 중에 실수가 계속되자 “내가 멍청이가 된 것 같아”라고 울먹이던 선배 모습. 그때 당시 10년 넘도록 회사를 다니면서 선배에게 참 사건도 많았지. 마감 때문에 쉬는 날 나와 일하다가 임신 중이던 둘째를 조산했고, 그 후로 생긴 갑상선암. 그것도 나중에 임파선으로 전이가 되어서 또 수술해야 했잖아. 급기야 공황장애 증세가 오기 시작하면서 선배는 회사를 그만뒀어.

고비고비를 넘길 때마다 대단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건강이 우선인데 꼭 이렇게까지 회사를 다녀야 하는 건가 싶은 마음도 솔직히 있었어. 그래서 선배가 사표를 쓴다고 했을 때, 나는 그저 더 버틸 만한 체력이 안 된다고만 생각했어. 잘한 선택이라는 마음도 있었지. 올해 초 선배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선배가 그날 들려준 이야기는 정말 충격적이었어.

“어느 날 출근했는데 갑자기 모니터 화면이 하나도 안 보이는 거야. 세수를 하고 와도, 밖에 나가서 바람을 쐬고 와도 글자가 하나도 안 보여. 일을 해야 하는 데 말이지. 나중에 글자는 겨우 읽을 수 있게 됐는데 세상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 거야. 나는 편집기자인데….그때 그 마음은 정말 뭐라 표현을…. 

그랬는데 출근할 때 지하철에서 숨을 못 쉬는 상황이 오고, 도저히 안 되겠어서 나중엔 정신과 상담도 받았는데 의사가 하는 말을 내가 하나도 못 알아 듣겠더라고. 옆에 있는 남편이 통역하듯 이야기해주면 그제야 겨우 알아듣고…. 그때 나는 정말 힘들었어. 암 걸려도 회사를 안 그만둔 나인데(웃음) 어쩔 수 없더라고. 더 버틸 수가 없었어.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말하는 번아웃이 그런 거였나 봐."

퇴사 이후 당연히 눈에 띄게 건강해진 선배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이 말을 들은 그때도,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미안해서 눈물이 나. 몰랐어. 그 정도일 줄은. 내 주변을 돌아볼 생각을 그때는 많이 못 했나 봐. 선배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다고 오히려 나를 위로했지만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렇게 힘들 때 옆에서 아무 도움이 안 되었다는 게 참…. 그래도 선배와 나는 한 지역에 살면서 10년 가까이 함께 일했는데…. 너무 미안하더라. 해결은 못 해줘도 힘든 하소연 같은 건 그냥 들어줄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퇴사 후에 두 아이를 돌보면서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선배가 참 좋아 보였어. 전보다 더 수다스러워지고, 더 많이 웃는 모습도 좋았어. 어느 회사 어느 부서 누구가 아니라, 이제야 선배라는 사람이, 선배라는 나무가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어. 그제야 나도 알겠더라고. '꽃도 잎도 열매도 떠나고' 온전히 몸통만 남은 겨울나무처럼 선배라는 나무가 온전히 선배의 모습으로 ‘햇살에 빛나는 것’도, ‘조용히 웃고 서 있는 것’도 말이야.

선배, 이 그림책 표지 한번 봐봐. 참 예쁘지? 그런데 말이야. 누가 봐도 나무 한 그루인데…. 자세히 보면 뿌리처럼 보이기도 하지 않아? 나는 선배라는 나무가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얼마나 줄기를 올려야 하나, 어디쯤 가지를 나눠야 할까 머뭇거리며 살지라도, 견디다 견디다 살갗에 깊은 주름들이 생겨나더라도' 큰 뿌리 잔뿌리 깊이깊이 내려 단단하게 서 있어주었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아프지 말고, 건강하자' 나도 그럴게. 선배, 우리 다음엔 양화대교 건너서 한 번 만나.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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