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퇴근 아내에게 “냉장고 정리는 여자의 기본”이라뇨
새벽 퇴근 아내에게 “냉장고 정리는 여자의 기본”이라뇨
  • 칼럼니스트 최은경
  • 승인 2020.09.14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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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한번 해봤어] '냉장고는 엄마의 성역'이라고 말하지 않을 거야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개그맨 부부들의 생활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관찰 예능 ‘1호가 될 순 없어’(JTBC)를 보게 됐다. 마침 김지혜·박준형 부부가 냉장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종종 냉장고 문을 열어 두는 아내의 ‘버릇을 따끔하게 고쳐주겠다'(누가 누구의 버릇을 고치겠다는 건지,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알 수 있겠지만)며 벌어진 일이었다.

◇ ‘냉장고는 아내의 성역’ 언제까지 방송에서 이런 말 들어야 하나

새벽 세 시 퇴근한 아내에게 냉장고 정리는 기본이라며 타박하는 남편. 왜 냉장고 정리가 아내만의 몫인가. 유통기한 지난 식료품, 본 사람이 버리면 그만인 일이다. JTBC '1호가 될 순 없어' 방송 화면 갈무리. ⓒJTBC
새벽 세 시 퇴근한 아내에게 냉장고 정리는 기본이라며 타박하는 남편. 왜 냉장고 정리가 아내만의 몫인가. 유통기한 지난 식료품, 본 사람이 버리면 그만인 일이다. JTBC '1호가 될 순 없어' 방송 화면 갈무리. ⓒJTBC

‘버릇’ 고쳐 놓을 생각만 했지, 아내가 일 마치고 새벽 세 시에 들어와 자고 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이 굳이 자는 사람을 깨워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여차여차해서 부부가 함께 냉장고를 정리하게 되는데, 냉장고에 방치된 내용물을 꺼내 보니 우선 그 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뿐인가? 유통기한 지난 식료품, 싹(!)이 난 수삼, 소중하게 포장되어 있었지만, 안에는 거의 썩을 지경에 이른 아보카도까지! 테이블 위로 수북이 쌓였다. 박준형은 김지혜의 ‘민낯’을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며 사진을 찍고 계속 깐죽댄다. 

박준형은 냉장고 꼴이 이게 뭐냐고 아내에게 계속 타박을 했다.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무를 이렇게 방치했다고 원망했다. 싫은 소리도 한 번이지. 정리하고 있는 김지혜를 향해 계속 잔소리를 하고 놀렸다.

김지혜는 본인도 냉장고 상태가 이 정도인지 몰랐는지 처음엔 기가 막혀서 혹은 무안해서 웃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박준형의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들에 결국 분노의 게이지가 점점 상승하고 결국 폭발하고 만다.

“새벽 세 시에 와서 쉬려는 사람에게, 왜 일을 만들어?”(김지혜)

“지금 짜증 내는 거야? 왜 짜증을 내?”(박준형)

“살림하다 보면 (냉장고가) 이럴 수도 있어. 그리고, 내가 살림만 해? 나는 일도 하고, 살림도 하고, 애도 키우고, 몸이 세 개라도 바쁘다고.”(김지혜)

내가 하려던 말을 김지혜가 대신했다. 속이 다 시원했다. 헐! 그런데 박준형이 계속 말하길.

“임미숙 선배 못 봤어?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 (살림한다면) 적어도 ‘기본’은 해야 할 것 아니야.”

그 장면을 보고 20여 년 전 우리 집 모습이 떠올랐다. 박준형이 하던 행동은 어린 시절에 본 우리 아빠와 똑같았다. 아빠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물들을 냉장고에서 꺼내며 ‘여자가 살림을 이렇게 한다’고 잔소리했고, 엄마는 김지혜가 말한 것과 한 자도 틀리지 않게, ‘똑같이’ 말했다. 

나는 엄마 아빠가 왜 싸우는지 의문이었다. 더럽다고 생각한 사람이 치우면 되는 거 아닌가?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은 발견한 사람이 그냥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 놀란 건 그날 게스트였던 요리연구가 이혜정 씨가 한 말 때문이었다.

“아내들에게 냉장고는 성역이잖아요. 아내의 냉장고를 건드리는 행위는 절대 해선 안 될 행동이죠. 모른 척 넘어갈 수 있는 걸 싸우자고 도전장을 내미는 거예요.”

◇ 고정관념 안 바뀌면 백종원이 한 트럭 와도 성평등 어렵다

냉장고 정리 안 했다고 "당신은 개.살.녀(개같이 살림하는 여자)야"라는 모욕적인 말 까지 듣다니. 언제까지 이런 풍경을 방송에서까지 봐야 하나. JTBC '1호가 될 순 없어' 방송 화면 갈무리. ⓒJTBC
냉장고 정리 안 했다고 "당신은 개.살.녀(개같이 살림하는 여자)야"라는 모욕적인 말 까지 듣다니. 언제까지 이런 풍경을 방송에서까지 봐야 하나. JTBC '1호가 될 순 없어' 방송 화면 갈무리. ⓒJTBC

속상한 김지혜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말이었다고는 생각하지만,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상은 참 많이 달라졌다고 하는데 왜 1990년대의 엄마와 2020년 김지혜의 상황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지. 그리고 생각했다.

'왜 냉장고가 아내들의 성역이지?' 

나는 한 번도 냉장고를 나만의 공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내 구역'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냉장고를 아내의 성역’이라고 한 말에 방송 출연자들이 왜 다들 공감하는지 궁금했다. 

우리 집 냉장고를 한번 떠올려 봤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냉장고 문을 여닫는 건 아이들이지 내가 아니다. 자주 이용하는 빈도로 치면 냉장고는 당연히 아이들 공간이다.

냉장고에 보관하는 식료품은 대부분 구매해서 넣어둔 것인데, 식료품을 사는 일은 나도 하고 남편도 하고, 때로는 함께 장을 보기도 한다. 냉장고에 있는 식료품을 재료로 음식을 만들고, 먹는 것은 나이기도 하고 남편이기도 하며 아이들이기도 하다. 심지어 이사 올 때 새로 산 우리 집 냉장고는 남편이 골랐다. 

즉, 냉장고는 가족 모두의 공간이지 여자의 공간, 나의 성역은 절대 아니란 말이다. 따라서 박준형이 주장한 ‘적어도 기본’인 냉장고 정리는 나도 할 수 있고 남편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아이들도 할 수 있다. 정리가 안 되어 있는 것 같으면, 누구라도 하면 된다. 

왜 냉장고 정리에 남자와 여자 구분이 필요한가. 왜 냉장고는 ‘여자의 성역’이라고 못 박아야 하나. 냉장고 정리 좀 안 했다고 ‘개.살.녀(개같이 살림하는 여자)’라는 모욕적인 말까지 들어야 하나. 참으로 이상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냉장고는 엄마의 성역’이라고 말할 생각이 전혀 없다. 절대 그렇게 느끼지 않도록 할 거다. 

백종원이 매일 눈 떠서 일어나자마자 냉장고를 뒤져 음식을 만들고, 냉장고를 ‘부탁’하던 셰프들이 방송에 아무리 많이 나오면 뭐 하나. 가정 내에서 엄마, 혹은 여자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달라지지 않으면 ‘성평등’은 아무리 외쳐도 소용이 없음을 박준형과 방송 게스트의 말에서 다시금 절감했다. 방송에서 이런 모습은 이제 안 보고 싶다.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성에 대해 아는 것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서 성교육 전문가에게 질문한 성교육 책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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