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서 발달장애인을 보지 못하는 이유
동네에서 발달장애인을 보지 못하는 이유
  • 칼럼니스트 박현주
  • 승인 2021.08.03 09: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래 꿈을 꾸는 아이] 세상 속 장애아이들의 '삶'에 대한 고민

어린이집 안에서는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제법 목소리를 내는 아이들과 아직 말을 하지 못하지만 소리만으로 존재감을 내뿜는 아이들의 소리가 섞여 정겹게 들려왔습니다. 기분 좋은 햇볕처럼 아이들의 소리가 내 마음에도 잔잔하게 퍼졌습니다. 문득 창밖으로 보았습니다. 유리하나를 사이에 둔 거리에 분주한 어른들의 모습이 지나갑니다. 바쁜 듯이 무심한 듯 사람들은 어린이집에서 보이는 골목 끝에서 골목 끝으로 등장했다 사라지곤 했습니다. 아이들이 재잘대는 이곳의 분위기와 대비된 거리의 풍경은 적막한 무채색의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어린이집을 개원하고 원장실이 바로 창가였기 때문에 창밖을 오래 오래 쳐다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시끌벅적한 어린이집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둔 바깥세상이 문득 낯설음으로 다가왔습니다.

종종걸음으로 지나가는 할머니, 강아지 산책을 시키는 어린 학생들, 학원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중고생들, 짐을 한 가득 들고 분주하게 걸음을 옮기는 중년의 아저씨, 유모차에 갓난아이를 태운 젊은 새댁. 모두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이었습니다.

가만히 시선을 옮겨 어린이집 안에 있는 어린아이들을 살펴봅니다. 우리 원의 아이들은 그 당시는 전체 48명. 그 중 아직 걸음마를 하지 못하는 중증장애아이들이 6명,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는 지적장애아이들도 둘 셋 있었고, 높은 소리로 가끔은 불쾌함을 드러내기도 하고 한 가지 놀이에만 몰입하고 있는 발달장애 친구들도 둘 셋. 10명이 훌쩍 넘는 장애아이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20%로 제한된 장애아이들이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시선을 옮긴 유리창 밖 세상에 우리 아이들을 닮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전 근무기관이었던 특수학교는 당시 대부분의 사립 특수학교가 그러하듯 산골짝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단출하게 세워진 학교라 생각도 못해보았던 일이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어린이집을 운영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이탈리아의 레지오에밀리아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어느 교육학 강의에서 들은 이야기. "어린이가 생활하는 공간은 가장 비싼 땅에, 가장 번화가에 생겨야 한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에는 천진한 보호심,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오가는 길가 쪽에 어린이집을 세우고 나서 창밖에서 어린이집 안을 볼 수 있도록 선팅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문득 쳐다본 어린이집 밖의 세상은 커다랗고 투명한 유리 창문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상 같은 이질감이 들었습니다. 저쪽 세상과 이쪽 세상의 온도차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던 어느 장애인 아저씨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시골 동네에 식구처럼 지내던 발달장애인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내가 살던 동네는 작은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한 쪽 눈이 없어 한 쪽 눈만 감겨 있는 아저씨는 동네 아이들에게 기꺼이 놀림감이 되길 허락하시며 번데기 장사를 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아저씨를 졸졸 따라 다니며 "애꾸눈이다. 번데기 애꾸눈이다. 번~ 데기데기"를 외쳤습니다. 애꾸눈이었던 번데기 아저씨를 뒤 쫒아 속없는 웃음과 놀림의 노래를 부르며 그렇게 마을을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저씨가 간간히 종이를 말아 담아 아쉬울 만큼 담아주는 번데기를 몇 알을 얻어  먹으려고 한껏 들떠 있기도 했습니다. 아저씨도 이런 동네 꼬마 아이들의 마냥 짓궂음이 싫지만은 않은지 번데기 리어카를 끌다가도 잠시 쉬어갈 때면 고만고만한 내 또래의 친구들을 안아서 빙글 돌려주는 몸 놀이를 해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아저씨를 장난스럽게 놀리긴 했어도, 아이들은 아저씨를 좋아했던 모양이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에게 아저씨의 한쪽 눈이 없어 한쪽 눈이 감겨 있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입구에 있던 버스정류장 맞은편 2층 집은 아주 옛날 일본식 나무집이었습니다. 그 일본식 나무집에는 아주 정갈하게 비녀를 꽂은 할머니가 살고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도 종종 만났던 걸로 미루어 노부부가 아들과 함께 사는 곳이었던 듯합니다. 할머니는 항상 의자를 길가에 내다 놓고 앉아서 볕을 쬐곤 했습니다. 내가 학교에 갈 때도 늘 그 자리에 앉아 계셨고, 학교에서 돌아올 때도 늘 같은 곳에 앉아 계셨습니다. 동네 할머니들이 어촌 마을의 흔한 부업, 조개 까기나 생선을 씻어 말리는 등으로 바쁜 날들을 보낼 때에도 할머니는 일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할머니의 아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스물을 넘어 서른, 어쩌면 마흔이나 되었을까.

삐쩍 마른 몸에 걸음은 마치 갤로핑을 하듯 리드미컬하게 뛰어다니며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말입니다. 손에는 구질구질한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100개 쯤 될까. 한 움큼 가득 찰 만큼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동그랗게 모아 한아름씩 잡고 다녔습니다. 길거리를 특유의 걸음으로 뛰어다니다가 아이스크림 막대기만 보이면 주워서 모았습니다. 손이 까맣게 더러워져도 할머니의 아들의 옷은 비교적 깨끗했고, 얼굴도 제법 잘생겨서 동네 할머니들의 아쉬움의 혀끝을 차게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동네 아이들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로 별도 만들고 고무줄 총도 만드는 것이 그 당시 유행하던 놀이였기 때문에 하루는 용기를 내어 그 청년에게 가서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누가 얻어 올 것인지 상의하기도 했습니다. 어렵게 가위바위보로 정한 친구가 그 청년에게 다가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달라고 했을 때 의외로 거부 없이 내어주었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그 청년의 입장에서는 초등학생들에게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빼앗겼는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다가감이 그리 두렵지 만은 않은 특이한 청년이었습니다.

어린이집, 학교를 떠나 세상 속에서 살아갈 우리 아이들의 삶은? ⓒ베이비뉴스
어린이집, 학교를 떠나 세상 속에서 살아갈 우리 아이들의 삶은? ⓒ베이비뉴스

◇ 뒤늦게 마음에 들어온 성인 발달장애인들의 삶

지금 생각해보면 그 청년은 자폐성 장애인이었지만 그 당시는 '자폐'라는 단어조차 생소한 시대였을 겁니다. 이렇듯 내가 살던 마을은 아주 작은 동네였지만 두어 명 정도 장애인들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고만고만한 동네에 살다가 대학을 가느라 떠나오고, 또 직장생활을 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특수교육 전공이라고 하더라도 직업으로서 아이들을 봐왔던 시기에 우리 마을의 발달장애인들의 삶을 연결시켜 고민할만한 계기가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지나서 어린이집 운영이 조금 익숙해지자, 어느 시설에서 자원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마을에 자연스럽게 그림처럼 녹아 있던 이들이 시설로 하나 둘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시설에서 자원봉사는 하루하루 마음을 에이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몇 해 간 노력해 취득한  미술치료사 자격증을 살려 미술치료를 하고 있었습니다. 시설 내에는 조현병을 앓는 성인이나, 치매 등의 노인들도 상당수 있었지만 제 눈에는 어림잡아 50% 정도 되는 이들이 발달장애인으로 보여졌습니다.

그곳에서 40, 50대를 보내는 발달장애인들은 그 옛날 특수학교의 초등 선생님을 추억하고, 엄마가 머리를 빗겨줬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그림재료로 제공하는 크레파스 냄새를 아련하게 맡으며 크레파스 냄새가 익숙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내고 떠오르는 일들을 나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잠깐의 봉사활동경험, 경험을 바탕으로 만난 성인기의 발달장애인들은 유아에만 머물렀던 나의 지경을 넓혀주었던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성인 발달장애인들과 그들의 삶에 관심이라곤 없던 내가 그들이 수용된 이곳에서 그림으로, 그들이 선택한 색으로 끄적임으로 그들의 마음을 읽는 일을 하고 보니, 그제야 '사람'이 보였습니다.

내가 가르치는 가르침의 대상도 아니었고, 시설에 수용된 발달장애인도 아닌, 그제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보였습니다. 내가 부모를 그리워하듯 이들도 부모가 얼마나 그리울까. 네모난 버스를 얼마나 타고 싶어하는 지. 아이스크림이 간식으로 나오는 날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 그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의 그림에서는 이들의 욕구가 보였고, 그 욕구는 부끄럽게도 사람이면 당연히 하고 싶은, 그저 ‘삶’이었습니다. 대단한 욕심이 아니라 그저 ‘사는 것’이었습니다. 여느 사람들, 우리들처럼요.

길가다 더위에 목마름에 내 입맛에 맞는 음료 하나 사 먹는 일이, 예쁜 옷이 걸려 있는 가게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 볼 수 있는 것이, 너무 너무 피곤한 날 밥 대신 치킨을 시켜 먹는 그 소소한 나의 삶들이, 삶을 송두리째, 몇 십년간 구속당한 이들에게는 얼마나 대단한 일이고 사치인 일인지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낮 시간의 봉사활동이 끝나면 다시 어린이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이렇게 예쁘고 맑은 아이들인데, 아이들이 자라 시설에서 눈빛을 잃고, 개구짐을 잃고 늙어버리고 낡아버린 부모와 세상에 대한 그리움을 먹고 묵묵히 외로움을 배설하며 수 년, 누군가는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면...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지금의 예쁘고 맑은 아이들을 ‘잘 가르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고 아이들에게 한없이 미안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잘하는 이도 있고 못 하는 이도 있습니다. 빠른이는 세상을 이끌어 살아 갈 것이고, 느린이들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세상을 정화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이 삶이 유아에만 머무르지 않고 아이들이 자랐을 성인기의 삶을 고민하고 우리가 살아갈 마을의 일에도 기웃기웃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탈시설에 대한 선택은 누가 하는 것일까요?

같은 일을 해도, 완전한 탈시설을 주장하는 전문가와 보호자가 있는가 하면, 장애의 정도를 이유로 탈시설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보호자와 전문가도 있습니다. 세상에 똑같은 아이는 없듯, 똑같은 장애와 똑같은 삶은 없습니다. 장애를 보는 짧은 역사가 말해주듯 어느 것도 정답이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을 혼란스럽다고 느끼기 충분합니다. 어떤 것이 옳은지 누구하나 정답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긴긴 인류의 역사에 비해 '장애'에 대한 고민은 이제 고작 시작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모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들의 삶에 대한 문제는 그들에게 온전한 '경험'이 주어져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아직 정답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온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온전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탈 시설이나, 마을에서 살아가기 같은 꿈같은 계획은, 우려하는 많은 이들의 걱정대로 실패할 수도 있고, 또 자주적인 삶을 꿈꾸는 많은이들의 소망처럼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확률과 숫자로, 경제성의 논리로 성공과 실패를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이들의 삶을 '성공', '행복'으로 이끌지 많은 이들이 함께 고민해 볼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완전한 탈시설을 주장하기에는 나 역시 그들의 삶을 살아보지 않아 불안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이런 논의들조차 당사자가 아니다 보니 주제넘은 제안일지도 모르지요. 문득 팽팽하게 맞서는 이들을 볼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당사자가 아닌 우리가 왜 하고 있는지 조차 의문이 듭니다. 삶의 주체는 분명 당사자일 텐데 주변인들의 시설로 가야 한다, 시설 밖에서 살아야 한다 이런 주장들도 몹시 교만한 목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그리고 현재, 내가 아이들과 부모님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고민해봅니다. '경험의 힘'을 통해 오롯이 삶의 주체가 되는, 그냥 '사람'의 삶을 내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지, 나는 무엇을 지원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과 답도 없는 작은 고민의 조각들을 그저 나누는 일 밖에 없는 듯합니다.
 
나는 내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나이가 마흔이 넘어서도 아직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매일 그러하듯 오늘 하루를 되새겨보아, 행복했던 순간을 찾아봅니다.

오늘 아침 등원 길에서 매미 소리를 내는 어린 아이의 천진한 표정을 보았을 때, 어린이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어린이집 뒷마당을 치우고 땀을 식히며 얼음을 동동 띄워 타 먹었던 믹스 커피 한잔. 집에 와서 가족들과 나누어 먹을 음식을 하고, 하루를 나누었던 소소한 저녁시간. 잠들기 전 아이들 몰래 꺼내먹었던 아이스크림 하나. 나에게 행복이란 감당하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크고 값진 것에서 오는 행복보다 우리들의 행복감은 어쩌면 소소한 일상이 주는 것이 더 많을 겁니다. 나는 내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소소한 일상을 함께 누리는 즐거움을 내 아이들이 그대로 누리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발달장애인들이 행복한 세상은, 세상 모두가 행복한 세상일 테니까요.

*칼럼니스트 박현주는 유아특수교육을 전공해 특수학교에서 근무했다. 결혼과 출산을 겪으면서, 내 아이를 함께 키우고 싶어 어린이집을 운영하게 됐다. 화성시에서 장애통합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부모님들과 함께 꿈고래놀이터부모협동조합을 설립하는 데 동참해, 현재 꿈고래놀이터부모협동조합에서 장애영유아 발달상담도 함께 하고 있다. 다양한 아이들을 키우는 일, 육아에서 시작해 아이들의 삶까지, 긴 호흡으로 함께 걸음으로 서로의 고민을 풀어내고자 한다.

【Copyrightsⓒ베이비뉴스 pr@ibabynews.com】

베사모의 회원이 되어주세요!

베이비뉴스는 창간 때부터 클린광고 정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언론으로서 쉬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비뉴스는 앞으로도 기사 읽는데 불편한 광고는 싣지 않겠습니다.
베이비뉴스는 아이 낳고 기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대안언론입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에 동참해주세요. 여러분의 기사후원 참여는 아름다운 나비효과를 만들 것입니다.

베이비뉴스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베이비뉴스와 친구해요!

많이 본 베이비뉴스
실시간 댓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78 경찰공제회 자람빌딩 B1
  • 대표전화 : 02-3443-3346
  • 팩스 : 02-3443-3347
  • 맘스클래스문의 : 1599-0535
  • 이메일 : pr@ibabynews.com
  • 법인명: 베이컨(주)
  • 사업자등록번호 : ​211-88-48112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서울 아 01331
  • 등록(발행)일 : 2010-08-20
  • 발행·편집인 : 소장섭
  • 저작권자 © 베이비뉴스(www.ibaby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개인정보보호 배상책임보험가입(10억원보상한도, 소프트웨어공제조합)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유미 실장
  • Copyright © 2024 베이비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ibabynews.com
ND소프트